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철학의 쓸모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 발견하고 다른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더 크게 확장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구호는 상식처럼 들리지만, 그 배후에는 수많은 정치적 입장을 떠받치는 모종의 형이상이 도사리고 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지, 무엇이 가능한 일이고 무엇이 상상 속에나 있는 일인지 등에 대한 한 묶음의 전제가 이미 깔려 있는 것이다. 이 조언이 사실 뜻하는 바는 아주 쉬운 말로 번역할 수 있다. "기대 수준을 낮추어라"이다. 이런 조언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현실에 대해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가?
노예를 가축과 마찬가지의 재산으로 보는 재산 노예제chattel slavery가 폐지되었을 때,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을 때, 동성애자 부부에게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었을 때, 바로 그 순간 무수한 사람들의 현실이 바뀌었다. 그러한 변화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곳의 현실 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모리타니나 인도의 재산 노예제를, 사우디아라비아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 권리를, 이란이나 우간다에서 행해지는 동성애 범죄화를 보라. 하지만 다른 사상과 생각이 울려 퍼지는 다른 곳에서는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 공동체 등이 전혀 다른 현실을 살고 있다. 생각이 현실을 이미 뒤집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낸 생각들이 계몽주의 사상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나는 앞서 주장했다. 특정한 생각이 규범으로 확고히 뿌리내리면 세상은 변한다. 진보의 현실성을 부인하는 것은 현실 자체를 부인하는 일이다. 진보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한다면, 현실을 들어 퇴보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여러 논리도 어리석기는 매한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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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진보라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의상 진보란 본래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것은 진보라고 하지 않으며, 오로지 미래에(내일 아침이라면 제일 좋겠다)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만이 진보가 된다. 앞의 세대가 이루어 놓은 일을 진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토록 힘들게 싸워 이루어 놓은 것들이라는 게 조금만 지나면 원래부터 당연히 그랬어야 할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종 분리라는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라난 세대는 그게 없어졌다는 게 어떤 성취인지를 알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런 게 옛날에 존재했다는 것에 놀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이러한 망각이야말로 바로 인종 분리를 뒤엎기 위해 싸워온 이들의 목표였다. 즉 인종 분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누가 이토록 야만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받아들였는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세상이 오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오늘날이라면, "창자를 뽑고 몸을 네 조각으로 자르기"라는 처형 방식을 폐지하자는 데 모두 찬성하도록 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인종 분리의 폐지 또한 마찬가지의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오늘 우리가 겪는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진보란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더욱 교묘한 형태의 여러 정의롭지 못한 일을 종식시키는 작업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진보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진보가 왜 이렇게 더딘가에 대한 분노는 아마도 우리가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어깨를 밟고 서 있는지를 이따금 내려다보는 것도 힘을 내는 한 방법이다. 과거에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미래에 더 많은 진보를 이루자는 희망을 결코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의로운 사회라는 게 아직 얼마나 요원한지를 알게 된다면 과거에 이룬 진보만으로는 우리를 지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정의를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지금 유행하는 최신 권위주의 선동가들에 비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란의 여성들, 토지를 빼앗긴 브라질의 노동자들, 콩고 혹은 미얀마의 민주주의 활동가들, 이들 모두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싸우고 있다.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힘을 지탱하는 한 원천이 된다. "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노엄 촘스키의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 그런데 주주들에게 책임을 다하느라 바쁜 대기업들은 그 와중에 일부 주주가 당기 순이익 말고 신경 쓰는 다른 단어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기들의 언어도 바꾸었다. 홈리스homeless라는 말 대신 "살 집이 없는 Ounhoused"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장애인disabled"이 아니라) "다른 능력을 가진 이들differnty abled"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옛날의 노예들은 이제 "노예화당한 인격체enslaved persons"라고 불리게 되었 다. 물론 이러한 말 바꿈은 그 이름으로 지칭되는 이들을 존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살 집이 없는 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홈리스"보다 처지가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언어 순화의 효과라는 게 있다면 극악한 현실을 덜 고통스럽게 들리도록 하는 것뿐이다. "홈리스"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살 집이 없는 이"가 되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의 불행을 담고 있으며, "홈리스"라는 무정한 말은 오히려 이러한 차가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노예화당한 인격체"라는 말도 비슷한 방식으로 노예제의 시퍼런 칼날을 무디게 보이는 효과를 낳는다. 오늘날에는 다시 상기시킬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옛날에 노예를 사고팔고 했던 이들은 그 들을 사람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때로는 언어가 듣는 이에게 그 언어가 지칭하는 상황과 똑같은 만큼의 아픔을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언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현실을 그릇되게 전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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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오로지 개인적인 것만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식이 되면서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다. 당신을 어떤 대명사로 지칭할지를 바꾸어내는 것이 마치 대단한 급진적 변화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대명사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그것 말고는 달리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희망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논리는 단순하다. 만약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힘 있게 행동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할 수 없다면, 종말론자들의 모든 예언이 현실이 될 것이다.